불확정성 원리

2012. 2. 21. 11:19
몇 주 전 저널클럽 시간에 연구실의 다른 사람이 한달 전쯤에 화제가 됐던 불확정성 원리 실험에 대해 발표했다. 실험 그 자체에 더해서 마사나오 오자와가 2003년에 발표했던 수정된 불확정성 원리에 대한 이론 논문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는데, 듣다 보니 적어도 그 결과는 그리 어렵지 않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어 할만한 내용이어서 정리해보았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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ε(X) η(P) ≥  hbar / 2

하이젠베르크가 1927년에 발표한 불확정성 원리는 원래 측정 오차 ε와 상태 교란  η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식이었다. 예를 들어 전자의 위치 X를 광자로 측정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. 파장이 짧은 광자를 쓰면 전자의 위치를 더 정확히 결정해서 측정 오차를 줄일 수 있지만 그만큼 전자의 운동량 P는 더 많이 교란된다. 파장이 긴 광자를 쓰면 운동량의 교란은 줄일 수 있지만 그 대신 위치의 측정 오차는 커진다.

이 관계식이 원래 전자가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 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하자. 저 식만 놓고 보자면 전자가 특정한 위치에 특정한 운동량을 가지고 존재할수도 있다. 다만 우리가 두 값을 동시에 측정할 수만 없을 뿐이다.

하이젠베르크는 전자가 가우시안으로 공간상에 퍼져있는 특정한 상태에 있다고 가정하고 이 관계식을 증명했다. 일반적인 상태에 대해서는 증명을 하지 못했는데, 이는 아직 측정이란 것을 어떤 모델로 다뤄야 할 지에 대한 이론이 충분히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. 사실 측정은 커녕 양자 역학 자체도 잘 정립이 안 되어 있던 시절이었다.

σ(X) σ(P) ≥  hbar / 2

그러던 중에 1929년에 로버트슨이라는 물리학자가 새로운 형태의 식을 내놓았다. 이 식은 측정과 그에 의한 교란을 이야기하는 대신에 물리량 자체의 분산 σ를 다루고 있다. 이 식에 따르자면 굳이 측정을 하지 않더라도 원래 전자의 위치의 분산과 운동량의 분산의 곱은 어떤 값보다 항상 커야 한다. 즉, 전자는 더 이상 특정한 위치에 특정한 운동량을 가지고 존재할 수 없으며 위치와 운동량 공간에서 어느 정도 이상으로 퍼져있는 상태로만 존재할 수 있다. 전자가 특정한 위치에 존재할 수도 있지만 대신 운동량의 불확정성은 무한히 커져야 한다. 특정한 운동량을 가질 수 있지만 그러면 전자가 전 공간에 균일하게 분포해서 더 이상 어느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.

이 새로운 불확정성 원리의 식과 그 의미는 곧 물리학계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. 우리는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측정할 수가 없는데, 이는 측정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생기는 교란때문이 아니고 원래 전자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. 더 이상 물리학자들은 불확정성 원리를 이야기할 때에 측정과 그 교란을 말하지 않게 되었고, 오자와에 따르면 하이젠베르크도 점차 이 해석을 받아들였다고 한다.

(흥미롭게도 초기의 이 혼란은 아직까지도 그 자취가 남아있다. 일반물리 수준에서는 불확정성 원리를 이야기할 때에 꼭 측정과 교란 이야기를 하지만 전공 수준으로 가면 더 이상 그 이야기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.)

하지만 여전히 측정을 할 때에 일반적으로 얼만큼 교란이 일어날지는 생각해볼만한 문제였고, 오자와가 2003년에 한 일이 바로 측정 오차와 교란 사이의 좀 더 일반적인 관계식을 찾는 거였다. 위치와 운동량을 생각한다고 하면 새로운 불확정성 원리는 다음과 같다.

ε(X) η(P) + ε(X) σ(P) + σ(X) η(P) ≥  hbar / 2

이 식에 따르자면 측정 오차와 교란된 정도 사이의 곱이 하이젠베르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아질 수 있다. 예를 들어 원래 위치가 잘 고정된 전자였다면 (σ(X)가 아주 작고 σ(P)가 아주 컸다면) ε(X)와 η(P)의 곱이 hbar / 2보다 훨씬 작아질 수 있다. 그러니까 원래 운동량이 잘 정의되지 않는 전자였다면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해도 운동량이 별로 교란되지 않는 것이다. (하지만 여전히 운동량은 많이 불확정적이었기 때문에 정확히 정할 수 없다.)

새로운 불확정성 원리의 식에서 수정된 것이 하이젠베르크의 처음 불확정성 원리이지 로버트슨의 식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자. 새로운 식 때문에 변한 건 측정과 그 교란의 관계일뿐, 양자역학적인 상태가 원래 가지고 있는 불확정성은 아니다.

그리고 최근에 화제가 됐던 일은 저 새로운 관계식을 실험적으로 증명한 것이었다. 실험에서는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 대신에 중성자의 스핀을 사용했는데, 위치와 운동량이 동시에 정해질 수 없는 것처럼 서로 직교하는 방향의 스핀도 동시에 정할 수 없다. 특정한 방향으로 스핀을 준비한 뒤에 임의로 측정오차를 둬서 측정을 하고, 그 후에 얼마나 교란이 되었는지를 측정해서 둘 사이의 곱이 하이젠베르크의 예상보다 더 작아질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고 한다.

아무튼 그 실험과 이론 일 모두 아주 기초적인 것을 잘 파고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어 할만한 좋은 결과를 냈는데, 언론에서는 너무 자극적으로만 다뤄진 것 같아서 아쉽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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세줄 요약

1. 양자역학적인 대상은 애초에 불확정적으로 존재하고 있다. 이건 측정하고는 상관이 없다. 처음에 하이젠베르크가 생각한 불확정성 원리는 이거랑은 좀 달랐지만 곧 이 생각을 따르게 되었다.
2. 하이젠베르크는 측정 오차를 줄이면 줄일수록 상태가 많이 교란이 될거라고 생각했다. 특별한 경우에서는 이 말이 맞다.
3. 일반적인 경우를 봤더니 원래 많이 불확정적이면 측정을 정밀하게 해도 별로 교란이 되지 않는것 같더라. 최근에 실험적으로 이 말이 맞다는 걸 확인해서 큰 화제가 됐다. 
Posted by tuckoo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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젊은 예술가의 초상

2011. 2. 24. 21:05
잠깐 머리를 식히려고 도서관에 갔다가 잠깐 봤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자꾸 머릿속에 떠오른다. 학부 졸업즈음에 읽을 때에는 디달러스가 막 성인이 되어가는 2, 3장이 눈에 들어왔는데 이제는 예술가로서의 삶을 추구하기 위해 고국을 떠나는 마지막 장이 눈에 들어온다. 다른 걸 버리고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위해서 자기 유배의 길을 떠나는 모습이 멋졌다.

저렇게 살 수 있다면 무척 근사하겠지. 다른 사람의 삶을 모방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. 일단 모방할 수도 없다. 3년 위 대학 선배의 삶이라면 지나치다 싶게 비슷하게 갈 수도 있겠지만 100년 전 아일랜드 사람의 삶을 무슨 수로 똑같이 따라 한단 말인가. 이건 모방이 아니고 그냥 모티브를 따오는 것이다.

모방이던 모티브를 따오는 것이던 한다고 해보자. 그런데 문제가 있다. 디달러스가 한 일의 핵심은 떠나는 것이 아니고 예술가의 길을 가기로 확신을 가진 것이다. 내가 어떤 상황에 있건 글쓰는 것이 의미가 있는 일이란 걸 확신하고, 스스로가 가치있는 글을 쓸 수 있음을 확신한 게 핵심이다. 자기 유배니 떠남이니 이런건 따라할 수 있다. 하지만 그 확신은 따라할 수 없다.

그래서 어떡해야 하나.
Posted by tuckoo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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